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7세 (문단 편집) == 등극 배경 == [[튜더 왕조|튜더 가문]]은 원래 [[웨일스]]의 최고 귀족 출신[* [[웨일스 공]]의 방계후손이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 웨일스 공이 잉글랜드~영국 왕세자의 직위가 되기 전에는 브리튼인이 웨일스 공으로서 웨일스를 다스렸다.][* 영국 왕조로서는 특이하게도 [[앵글로색슨족|앵글로색슨]]이나 노르만, 유럽 대륙에서 연원한 가문이 아닌 브리튼 출신 가문이다.]으로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에도 영지와 특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전체로 치면 하급 귀족에 불과했는데 헨리 7세의 조부인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발루아|발루아의 카트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결혼해서 [[헨리 6세]]를 낳았다.]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격이 올라갔다. 오언 튜더와 카트린 사이에서는 두 아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가 태어났다. 카트린의 전 남편 헨리 5세는 헨리 6세만 남기고 1421년 프랑스 원정에서 전사했기에, 따라서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이 된다. 헨리 6세는 에드먼드와 재스퍼 튜더를 자신의 형제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각각 리치먼드 백작위와 펨브룩 백작위를 하사했다. 오언과 카트린의 장남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마거릿 보퍼트|보퍼트 가문의 마거릿]]과 결혼해[*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였던 곤트의 존의 증손녀였다. 보퍼트 가문은 비록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시조가 되는 가문이었지만, 이들은 어릴 때만 사생아였을 뿐 존과 캐서린이 재혼한 후에는 적자로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헨리 7세가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헨리 튜더를 낳았다. 부계로는 전혀 왕실과 관계가 없지만 할머니의 혈통을 거슬러가면 까마득하게 [[헨리 3세]]와[*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는데 당시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가와 귀족 사이에 혼인이 잦았다.][*계보 헨리 3세-잉글랜드의 베아트리스-브리타니의 블랑쉐-아르투아의 마거릿-나바레의 필리프 3세-나바레의 블랑쉐-[[장 2세]]-[[샤를 5세]]-샤를 6세-카트린-에드먼드 튜더-헨리 7세], 모계로는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헨리 7세의 어머니일 정도로 왕통에서 멀었다.][* 사실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문제는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이 에드워드 3세의 장손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헨리 4세]]이며, 에드워드 3세의 5남인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요크 가문의 시조로 그의 손자인 [[요크의 리처드|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 [[조지 플랜태저넷|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아버지다. 일단 랭커스터 가문은 왕위를 찬탈한 전적으로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헨리 4세는 재위기간 내내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는 그의 잔당에 시달리며 고달프게 왕위를 유지한 반면에, 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어머니 앤 드 모티머(Anne de Mortimer)가 에드워드 3세의 2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로 부계와 모계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아 더 정당성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여계승계도 인정하기 때문에, 요크 가에선 자신들이 리처드 2세의 적법한 후계자란 명분이 있었다.]까지 거슬러가야 왕의 혈통과 닿는다. 그러니 혈통으로만 치면 왕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장미전쟁]] 이후 왕족들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차례로 몰락하고 랭커스터 가문이 부계가 단절됐다. 다음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1남 [[흑태자 에드워드]] - 플랜태저넷 왕조로 모계, 부계 후손 단절 3남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1338~1368) - 부계단절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1340~1399) - 부계 후손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 보퍼트 가문은 존이 세번째 부인과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으나 나중에 리처드 2세가 적법화했다.] 5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1341~1402) - 앤트워프 라이노넬의 외손자 후손 자격으로 랭커스터 왕조보다 계승권이 앞선다고 주장함.[* 잉글랜드의 중세 왕위 계승은 남성우선으로 부계>모계이다. 그러나 윗대의 모계가 윗윗대 부계보다 앞선다. 쉽게 말하면 고모의 후손이 작은 할아버지보다 계승권이 앞선다.] 후손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있다. 8남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1355~1397) [include(틀:앙주 가문 계보도)] 어머니의 가문인 보퍼트 가문[* [[장미전쟁]] 이후 보퍼트 가문도 단절돼서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만이 유일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이었다.]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마거릿 보퍼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스스로 여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명할 때 Regina의 R을 붙여 서명했으며 엘리자베스의 복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요크 가문이 번성할 때는 부각되지 않은 채 브르타뉴나 프랑스 궁정을 떠돌면서 살았으나, [[리처드 3세]]가 즉위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하며 요크 가문이 분열되고 왕의 신망이 추락하면서 기회를 포착,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리처드가 신망을 잃은 것을 이용해 망설이던 주요 대귀족들의 방관과 자세력 규합을 이루어냈고 결국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를 전사시켰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리처드 3세]]는 자신의 형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을 무효화 시켜 두 사람의 자식들, 즉 리처드 3세 본인의 조카들마저 사생아로 선언한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4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신분이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눈독을 들인 에드워드 4세가 덜컥 결혼해버렸다. 당시에는 왕이 결정한 일이니 그냥 넘어갔지만 추밀원에서도 비판 받았고, 아무래도 신분이 처지는 배우자를 두면 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의 지위가 약해지는 게 그 당시 풍속이었다.] 이로 인해 요크 가문 내부에서도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조카를 폐위시킨 것만으로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급기야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와 그의 아우 리처드 왕자(에드워드 4세의 차남)를 [[런던탑]]에 감금해 무참히 살해해버리자 기존의 지지자들도 실망을 내비치고 권력기반이 분열되었다. 헨리는 리처드 3세에게 동생을 잃고 서출로 격하된 [[요크의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와 결혼해 분열된 요크 가문의 지지세력을 얻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신분이 떨어지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여 반발을 부르긴 했지만 명군으로 불릴만큼 통치는 잘 했기 때문. 정통성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랭커스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혼인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결합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어받은 셈이라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장미 전쟁 동안 귀족들이 수없이 죽고 다치면서 아예 단절된 가문도 많았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튜더 왕조가 종결된 [[제임스 1세]] 때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 가문이 30개의 오등작의 가장 아래인 남작 가문을 포함해 50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150년 가까이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강한 전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